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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Vision)에 관하여

easyahn 2024. 7. 14. 18:23

비전(Vision)이 있지만 없는 회사

 

"흠, 저 회사는 비전이 없구나"

모 건설회사가 새로운 대표 체제로 들어서며 새로운 비전을 선포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기사를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비전이 없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회사가 새로 발표한 비전은 ‘투명한 신뢰와 끊임없는 혁신으로 더 안전하고 행복한 삶의 미래를 완성합니다’이다.¹  

분명히 발표한 새로운 비전이 있는데 왜 나는 비전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비전이 두루뭉술했기 때문이다. 건설 회사가 아닌 다른 어떤 회사의 비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비전이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제약/식품회사의 비전이 ‘투명한 신뢰와 끊임없는 혁신으로 더 안전하고 행복한 삶의 미래를 완성합니다’라고 상상해보자. 크게 어색하지 않다. 

이렇게 어느 산업, 어느 회사에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비전을 나는 '만능 비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기업이 사업을 하는 기본 전제를 생각해 보면 결코 만능 비전은 좋은 의미가 될 수 없다.

나와라 가제트 만능 팔! 아, 아니 만능 비전!

기업들은 자신이 영위하는 사업에 따라 다른 운동장, 즉 상이한 산업과 시장에서 경기를 한다. 자연스럽게 회사마다 속한 산업과 시장의 특성이 다르다. 그렇다면 당연히 각 회사의 비전은 자신이 속한 산업이나 시장에 따라 달라야 한다. 축구장에서 도루 지시를 하거나, 야구장에서 프리킥을 찰 수는 없지 않은가. 

사업과 시장 환경이 다른데 아무 기업에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비전을 쓰고 있다? 이런 경우는 크게 두 가지 경우라고 본다. 자신의 회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본인들도 모르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비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거나.    

 

비전은 곧 우리의 '북극성(North star)' 

 

목적에 바탕하여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
(Based on that purpose, this is what we want to become)

 

미네소타 대학의 <PRINCIPLES OF MANAGEMENT>에서는 비전을 위와 같의 정의한다.² 비전은 기업의 존재 목적(Mission)에 바탕을 두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비전은 기본적으로 미래지향적이다. 당장 1-2년 안에 달성하기는 어렵지만 먼 미래에 우리가 도달하고픈 목표가 바로 비전이다.    

이미지 출처  : Accidental Leader, <Setting the North Star: Vision, Mission, and the Power of Shared Purpose>

 

비전의 이런 속성 때문일까? 비전에 관해 가장 흔한 비유는 북극성(North star)이다. 북극성은 옛부터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어두운 산속에서 길을 잃거나, 망망대해에서 헤맬 때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면 밝게 빛나는 북극성이 있었다. 그 북극성을 보며 사람들은 가야 할 길을 가늠하고, 목적지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나는 기업이 사업을 하는 지금의 환경도 과거에 북극성을 찾아 헤매던 옛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확실성을 뜻하는 '뷰카(VUCA)'라는 단어가 식상하게 느껴질 만큼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과거의 승자가 오늘의 패자가 될 수 있다. 더 이상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것은 없다. 유럽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를 액체의 성질에 빗대어 '유동하는 근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³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는 상황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모든 것이 변하는 환경일 수록 '그렇다면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뭘까?'를 고민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고 변하지 않는 것만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 

나는 변하지 않은 그 무엇이 바로 기업의 비전(그리고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비전의 의미와 역할은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바뀌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수시로 바뀌고 수많은 소음이 우리를 뒤덮을 수록 자신이 가고자 했던 곳이 어디인지 되새겨야 한다. 명확한 비전을 수립하는 건 화살을 쏘기 전 과녁을 정하고, 달리기를 하기 전 신발끈을 조이는 행위다. 좋은 비전을 세우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길을 잃지 않고,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갈 수 있다.

 

좋은 비전의 조건 3가지 

 

최근 네이버 웹툰의 나스닥 상장(24.6.27)이 화제였다. 네이버 웹툰의 상장은 국내 '콘텐트 플랫폼'이 글로벌에서 상장까지 한 첫 사례다. 개별 콘텐트들이 글로벌 흥행에 성공했어도 국내 플랫폼이 해외에서 인정 받은 사례는 드물었다.⁴ 기사에서 눈길을 끌었던 던 김준구 대표가 상장 이후 기자 간담회에서 했던 발언이다.  

주니어 시절 네이버웹툰을 ‘아시아의 디즈니’로 키우겠다며 목표로 잡은 기간이 36년인데,
이제 절반 조금 지났다

 

"36년 안에 네이버 웹툰을 '아시아의 디즈니로 키운다" 이 문장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네이버 웹툰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아시아의 디즈니구나. 일단 전세계 시장이 아니라 아시아에 집중할 거고, 웹툰을 통해 디즈니처럼 막강한 IP를 만든 다음, 영화나 애니매이션같은 다른 콘텐트를 추가로 만들어서 수익을 만들겠구나'라는 짐작이 간다. 그렇다. 김준구 대표가 주니어지 시절 잡았던 목표는 곧 네이버 웹툰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되고자 하는 모습, 바로 비전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김준구 대표의 비전은 좋은 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좋은 비전의 조건은 뭘까? 

나스닥 상장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김준구 대표(사진 가운데), 사진 출처 : 중앙일보 <‘아시아 디즈니’ 목표, 절반 지났다”…美 증시 성공 데뷔한 네이버웹툰>

 

① 명확하고 쉬워야 한다 

 

좋은 비전은 명확하고 쉬워야 한다. 김준구 대표의 비전은 처음 문장을 접한 내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뜻하는 바가 명확하다. 특히 회사의 비전이라면 회사와 관련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회사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그들이 함께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전이 명확하고 쉬울수록 주변 사람들에게 비전을 이해시키기 위한 이후의 커뮤니케이션도 수월해진다.   

② 영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아시아의 디즈니라니. 디즈니가 어떤 회사인가. 전세계 IP사업의 최강자이다. 백설공주, 알라딘 같은 애니메이션 외에도 픽사, 스타워즈, 마블처럼 남들은 하나 갖기도 어려운 유명 IP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 그런 디즈니를 꿈꾼다니 나는 꽤 야심찬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만약에 정말 그 비전이 달성된다면 '꽤 멋지겠는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화나 콘텐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슴이 두근거릴 법한 비전이라고 느꼈다. 좋은 비전이라면 그 비전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멋지다', '한 번 해보고 싶다', '도전해 보고 싶다' 등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글로벌 콘텐트 사업의 절대 강자 디즈니. 보유한 IP가 후덜덜하다.

 

여기서 유의할 사항은 '영감을 준다 = 멋들어진 문장으로 적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건 포장보다 본질이다. 표현은 평범해도 그 안에 담고 있는 방향성이 옳다면 충분히 좋은 비전이다. 먼저 비전의 정의와 역할에 맞는 내용을 고민하고 그 내용을 어떤 표현으로 전달할지 고민하자. 선후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③ 시간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김준구 대표의 비전에는 36년이라는 시간 개념이 존재한다. 어떤 이유에서 36년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인이 생각했던 기간에서 이제 절반을 왔다'고 상장 직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말했다고 전해진다.  

시간은 일종의 제약 조건이다. 제약 조건이라고 하면 나쁜 역할만 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우선 제약이 명확하면 그 조건 하에서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지 고민하게 된다. 또한 제약 사항은 집중력과 몰입도를 올려 더 나은 성과를 만드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10년이 지나기 전에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키겠습니다.
(before this decade is out, of landing a man on the moon and returning him safely to the earth)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25일 의회에 출석해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 말한다.⁵ 약 한 달 전 러시아의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지구 궤도를 도는 우주 비행을 성공한 뒤였다. 역사상 가장 담대한 비전으로 꼽히는 케네디의 연설은 불과 8년 만인 1969년, 아폴로 11호 승무원들이 달에 발을 딛으며 현실이 됐다. 만약 10년이라는 시간 제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목표를 초과 달성하여 8년만에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기적이 가능했을까.

< 좋은 비전의 조건 3가지 >
① 명확하고 쉬워야 한다 
② 영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③ 시간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 참고자료
1. 김원, <허윤홍 GS건설 대표 ‘투명한 신뢰와 끊임없는 혁신’ 새 비전 선포>, 중앙일보, 24.7.13,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198

2.  University of Minnesota, , </principles of management>https://open.lib.umn.edu/principlesmanagement/chapter/4-3-the-roles-of-mission-vision-and-values/

3.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2012.8.14

4.권유진, <‘아시아 디즈니’ 목표, 절반 지났다”…美 증시 성공 데뷔한 네이버웹툰>, 중앙일보, 24.6.28,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9870
5.<The Decision to Go to the Moon: President John F. Kennedy’s May 25, 1961 Speech before a Joint Session of Congress>, 나사 공식 사이트, https://www.nasa.gov/history/the-decision-to-go-to-the-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