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기록&회고

권한이 없을 때 어떻게 조직문화를 바꿀까?

easyahn 2021. 5. 6. 16:43

침몰하는 배에 탑승하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 부서는 침몰하는 배야. 지안씨도 열심히 해서 빨리 다른 데로 가"

 

이런 이야기를 부서에 온 지 일주일 만에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실제로 부서에서 가장 고참에게 들은 이야기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부서의 역사를 보면 침몰하는 배가 맞았다.

 

처음 부서가 생길 때만 해도 미래가 밝았다. 신임 CEO가 부임하며 야심차게 조직 혁신을 내세웠고 HR 혁신 TF가 꾸려졌다. 바로 이 TF가 지금 부서의 전신이다. 외부에서 HR전문가가 영입되어 리더를 맡았다.

 

TF는 몇 가지 변화에 성공했지만 '혁신'이라고 부를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며 CEO의 관심은 사라졌고, 조직규모와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흔히 말하는 '끗발' 있는 조직 밑에서 점차 힘없는 조직 밑으로 소속도 바뀌어 갔다. 그런 와중에 내가 부서에 합류하게 됐다.   

 

기존 멤버들은 맡은 일은 열심히 했지만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열심히 해도 CEO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우리 부서가 뭔가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한탄을 자주 들었다. 자꾸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지금의 '상황'에 불만을 가지게 됐고, '어차피 뭘 해도 안 되는구나'라는 선입견이 생겼다.

 

권한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선입견을 깨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조직문화 관련 책을 읽는 독서모임에 참여하며 <어서 와 리더는 처음이지>의 저자 장영학 님을 만나게 된 일이다. 당시 영학 님은 샌프란시스코에 열린 조직문화 컨퍼런스 'Culture summit 2019'에 다녀온 직후였다.

 

거기에서 영학 님이 참여한 세션 중에 하나가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조직문화를 바꿀까?'였다. 평소에 내가 혼자서 고민하던 주제였다. 영학 님이 본인이 참여한 세션 이야기를 하며 처음으로 했던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스스로 권한이 없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담당자가 조직문화를 바꾸는 시작점은 스스로에게 권한이 없다는 생각부터 버리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신포도 우화처럼 '어차피 안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내가 그랬다.   

 

"권한을 획득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봤나요. 세일즈맨처럼 영업도 하고 윗사람을 설득해본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도 뼈아팠다. 왜냐면 그때의 나는 권한이 없다고 툴툴거렸을 뿐 권한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 권한에 관한 내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권한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다

 

'우리 부서에 CEO가 관심이 없다면 관심 가질 만한 일을 만들어주겠다'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던 중 '조직문화 진단'을 알게 되었다. 조직의 현재 문화를 진단도구를 활용해 점검하고 분석하는 일이다. 일단 현재 조직문화가 어떤지 CEO에게 알리자, 라는 게 생각의 시작이었다.    

 

조직문화 진단,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

 

조직문화 진단은 사실 내 역량 이상의 도전적 과제였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이곳저곳 물어보고 다녔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분들에게 대뜸 페북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고, 벤치마킹한다고 포항까지 다녀왔다. 그렇게 진단 문항을 만들고 전사원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했다. 또 한참을 낑낑거리면서 결과보고서를 만들어서 경영진 보고까지 끝냈다.

 

다행히 진단은 성과가 있었다. 경영진이 내가 만든 보고서의 메시지에 공감해서 '우리부터 바뀌어야 한다'라고 회의자리에서 한참을 이야기했다고 전해 들었다. 몇몇 조직들은 자체적으로 조직문화 개선방안까지 수립했다.

 

부서의 역할도 많이 바뀌었다. 기존 업무가 이벤트, 캠페인, 조직 활성화 중심이었다면 진단 이후로는 일하는 방식 개선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미약하지만 리더십 관련 업무도 생겼다.  

 

하지만 뒷심이 부족했다. 내외부적인 문제들로 후속방안 실행이 늦춰졌다. 내가 야심차게 계획했던 몇 가지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조직개편이 있었고 우리 부서는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대신 다른 부서와 합쳐지며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부서의 필요성은 인정받았지만 침몰하는 배라는 운명은 거스르지 못했다.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다.

 

지난 2년이 나에게 남긴 것

 

처음에 부서에 온 다음 선배들에게 들었던 '경영진은 우리 부서에 관심이 없다'는 잘못된 문장이었다. '경영진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을 우리 부서가 만들지 못했다'가 맞는 문장이었다. 조직문화 진단이라는 판을 벌리자 거기에 경영진은 반응했다. 그리고 후속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졌다.

 

조직에서 개인의 영향력은 어디까지일까? 예전의 나는 큰 조직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미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분명히 조직에서 한 개인은 작은 톱니바퀴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톱니바퀴와 맞물려 있다. 혼자의 힘으로 안된다면 나보다 더 큰 톱니바퀴의 힘을 빌리면 된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렇게 다른 톱니바퀴를 하나씩 움직이다 보면 어느 순간 거대한 조직이 움직인다. 지난 2년을 되돌아봤을 때 내게 남은 건  ‘스스로의 힘으로 조직을 움직여본 경험’이다.

 

아르키메데스의 말, "충분히 긴 지렛대를 달라. 그러면 나 혼자서 지구도 움직일 수 있으니"처럼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싶다. 그리고 조직문화 담당자로서 지금 조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  

 

*조직문화 진단 후기는 다음 글을 참고해주세요:)

 

조직문화 진단 회고 1편_시작하기 전에 생각해볼 것들

조직문화 진단 회고 2편_문항개발은 어떻게 해야 할까?

조직문화 진단 회고 3편_좌충우돌 결과분석 과정(+진단이 내게 남긴 것)

조직문화 진단 회고 4편_잘한 점과 못한 점 따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