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관한 생각

원하는 게 있다면 리더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하자

easyahn 2020. 7. 5. 12:05

상반기 내내 매달렸던 조직문화 진단이 6월에 끝났다. 지금은 결과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단계다. 조직문화 진단도 쉽지 않았지만 보고서 작성은 또 다른 난이도의 업무였다. 보고서를 쓰는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보고서를 작성하며 번아웃 직전까지 갔다. 하루는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아있는데 이유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글자 하나 타이핑 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 

 

번아웃의 원인은 데드라인을 고려하지 않은 팀장님의 보고서 무한수정이었다. 기본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의 양이 많은 상황에서 큰 방향을 바꾸는 피드백이 계속 나왔다. 만약 피드백 사항을 한 번에 알려주었다면 이 정도로 지치지 않았다. 하나를 고쳐가면 또 다른 하나가 나오고, 그걸 고쳐가면 또 다른 피드백이 나왔다. 말라죽는 느낌이었다. 

 

더 큰 문제는 보고서의 큰 방향성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방향성이 명확한 상태에서의 피드백은 일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겠지만,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피드백은 갈지(之)자로 휘청이게 만들었다. 보고서 작성 전, 작성 중 여러 번에 걸쳐 방향성에 대해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팀장님은 방향성을 정하는 것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수정사항을 피드백하기 바빴다. 

 

데드라인은 점점 다가오는데 피드백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과연 팀장님은 데드라인을 생각하며 피드백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도저히 데드라인에 맞출 수 없는 수준의 피드백 양이었다. 피드백을 듣고 있던 순간 뭔가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정해진 데드라인에 맞추려면 방금 말씀해주신 수정사항은 다 반영 못합니다" 

 

있는 그대로 내 현재 상태를 팀장님에게 말했다. 솔직히 지금 하는 일이 버겁다고. 다른 회사는 최소 2-3명이 함께 하는 일을 지금 저는 혼자서 몇 달째 하고 있다고. 데드라인을 늘리던지 아니면 피드백 양을 줄여달라고. 

 

계산된 행동은 아니었다. 너무 힘들어서 우발적으로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건 내가 속한 조직에서 좋은 행동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힘들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꾹꾹 마음속으로 참고 어떻게든 주어진 일을 해낸다. 그런 분위기가 있기에 나도 힘들다는 말을 지금까지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으면 다른 걸 떠나서 내가 죽을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은 팀장님은 놀래서 눈이 동그래졌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니 팀장님은 내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이 하는 일이 한참 바쁘게 돌아가고 있던 참이라, 그쪽을 신경쓰느라 보고서 작성에는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지금껏 웬만한 일은 알아서 잘 해왔으니까 이번에도 잘하겠거니 안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줄까요?"

 

예상하지 못한 말이 팀장님의 입에서 나왔다. 팀장님은 내 이야기를 한참 듣더니 남은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며칠이 더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대략 3일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팀장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데드라인을 내가 원하는 만큼 뒤로 미루었다. 그 뒤로 몇 번의 대화(사실은 충돌)가 더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요구사항을 말했다(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 팀장님 생각하는 보고서의 방향성을 명확히 알려달라, 피드백은 제발 한 번에 알려달라  등등

 

그러자 팀장님의 행동이 변화했다. 본인이 생각하는 보고서의 방향을 명확히 내게 전달했고, 다른 팀원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업무지시를 내렸다. 하루는 여러번에 걸쳐 피드백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보고서에 대해 논의한 다음에는 본인이 보고서를 더 자세히 볼 생각인데 피드백 사항을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서 이야기할지, 아니면 지금까지 나온 것만 가지고 이야기할지 무엇을 원하냐고 내게 물었다. 내 의사를 물어봤다는 건 자체가 '너를 존중한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무거웠던 마음은 어느새 가벼워졌다. 고립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팀의 지원을 받으며 일한다는 든든함이 대신했다. 당연히 번아웃도 사라졌다. 

 

이번 일을 겪으며 몇 가지 깨달은 게 있다. 

 

하나, 필요한게 있다면 리더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하자. 

 

나는 리더는 팀원이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고, 팀원이 어떤 상황인지 세세하게는 몰라도 대략은 알고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필요한 지원을 적당한 시점에 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리더는 독심술사가 아니다. 말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상황인지, 일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내 일만 신경쓰면 되지만 리더는 팀 전체의 일을 신경 써야 한다.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세밀하게 팀원 한 명 한 명의 모든 것을 캐치할 수는 없다.  

 

리더의 관심과 지원은 내가 적극적으로 요구해서 얻어내야 하는 일종의 제한된 '자원'이다. 가만히 있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둘, 힘들면 힘들다고 주변에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회사에서 힘들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는 게 쉽지 않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면 징징거리는 것 같고,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힘들다고 말하면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힘들다'가 '버겁다'가 될 때까지 꾹꾹 참으며 혼자서 일을 했다. 

 

그런데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일을 하다 보면 힘든 게 당연하다.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꾹꾹 혼자서만 참으면 마음에 병이 생긴다. 이번 프로젝트를 하며 고립감을 느꼈는데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고 혼자서 다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서 그런 것도 있다.  

 

만약 정상적인 팀에 속해 있다면, 도움을 손길을 내밀었을 때 누군가는 그 손을 잡아줄 것이다. 그러니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지 말자. 스스로 완벽해지려고도 하지 말자.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점이 있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서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일을 하려고 회사라는 곳에 소속되어서 수많은 사람과 '함께' 일하고 있지 않은가.  

 

*추신:몇 번의 충돌을 겪으며 팀장님과 전보다 소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한번 충돌한 다음에는 팀장님이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위계가 명확한 조직에서 팀장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팀원에게 먼저 사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지금 팀장님을 신뢰하고 될 수 있으면 같이 오래 일하고 싶다고 느끼는 부분이 이런 거다. 이야기하면 들으시니까. 직급으로 찍어 누르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니까. 이번 일 끝나면 팀장님하고 따로 맥주라도 한잔 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